애 낳은지 얼마나 됐다고
미드 [오렌지 이즈 더 뉴 블랙 시즌2]
어제 생전 연락도 없이 지내던 외사촌 동생에게 전화가 왔다. “언니 혹시 뭐 먹고 싶어?” 아침부터 웬 봉창 뜯는 소리인가? 하고 물으니 간밤에 내가 등장하는 꿈을 꿨단다. 7년 전 내 결혼식 때 보고 한번도 본적 없는 친척 언니의 안부가 새삼 궁금했을 리도 없고, 도대체 왜 내 꿈을 꿨다는 거지? “언니가 난데없이 미역국이랑 들깨가루가 먹고 싶다지 뭐야. 혹시 태몽?” “지금 우리 애가 생후 4개월이다. 태몽은 무슨…” 우스개 소리처럼 넘기며 전화를 끊기는 했으나 오전 내내 찜찜한 기분을 가눌 길이 없었다.
출산 후 수유기간 동안에는 임신이 안 되는 것이 상식이다. 모유는 아기에게 빨리면 빨릴수록 많이 생기는 법인데, 본인은 회복기가 되면서부터 외출을 자주하여 어쩔 수 없이 유축기의 힘을 빌어야만 했다. 주변에 두 돌이 다 되도록 아가와 눈길을 맞추며 젖을 물렸다는 (또 꼭 그래야만 한다는) 친구들이 많아서, 나도 둘 째는 순전히 모유로 키워보리라 다짐한적도 있었는데…. 그게 엄마의 희생을 보통 필요로 하는 일이 아니다. 일체의 사회 생활을 차단한 채 젖을 물리고 앉아 있다 보면 내가 사람인가 젖소인가 우울감에 빠지기도 하고, 잠시도 곁을 떠나지 않으려는 아기 때문에 엄마가 너무 고달파진다. 게다가 한국은 수유환경이 매우 열악하다. 데리고 외출이라도 하면 마땅히 젖을 물릴 곳이 없어 심지어 화장실에 앉아 젖을 물려야 하는 일도 있다. 아가도 소중하지만 내 인생도 소중하기에 나는 3개월까지만 젖을 물리고 그 다음부터는 기계로 유축해서 젖병에 담아 수유하는 방법을 선택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젖양이 조금씩 조금씩 줄어들었고, 백일이 조금 지난 무렵에는 젖이 거의 말라버리기에 이르렀다.
남편과 오랜만에 회포를 푼 것은 그래도 젖이 조금은 나오던 무렵이다. 그래서 피임은 아예 생각도 안 했다. 임신 확률을 가장 높여준다는 (하늘로 다리를 치켜 올리는) 자세를 취하기는 했으나 가임기는 아니라는 확신이 있었기에 “정말 괜찮은 거야?” 라는 남편의 물음에 “글쎄… 생기면 하나 더 낫지 뭐”라고 농담까지 던지며 여유만만했었다. 젖이 완전히 말라 버린 건 그로부터 불과 일주일쯤 지난 후다. 이제 월경이 시작되고 슬슬 피임을 시작해야 할 때인가? 라고 생각하며 인터넷으로 정보를 수집하다가, 쿠궁~ 가슴이 덜컥하는 글들을 보게 되었다. “출산 후 생리, 언제부터 하셨나요?”라는 질문에 대해 여성들의 증언이 제 각각이었던 것이다. “모유수유 중인데 3개월 때부터 시작했어요.” “딱 돌 무렵 젖을 끊었는데, 15개월쯤 후에 첫 생리가 터지네요” “6개월에 수유 끊자마자 바로 나오더군요”
그렇다. 사람의 몸은 로봇이 아니었던 것이다. 월경 주기로 가임기를 계산하는 방법이 절대 완전한 피임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다른 사람들에게는 누누이 강조해왔으면서, 나는 왜 출산 후 생리와 임신의 메커니즘이 100% 동일할 것이라 생각했던 것일까? 곰곰이 생각해보니 수유 중에 팬티에 약간의 혈흔이 묻어 있던 적이 있었는데, 혹시 그게 소량의 생리는 아니었을까? 그래서 찰떡같이 안심하고 과감한 자세까지 취했던 그 날 셋째가 생겨버린 건 아닐까? 아하. 생각해보니 1월, 12월 한 해에 태어났다는 자매도 있었다.
아이를 연년생으로 줄줄이 낫는 사람들에게 ‘참 재주도 좋다’ 라고 말했지만, 솔직히 마음 한 구석에는 ‘저 여자는 왜 인생의 황금기를 임신과 출산, 육아로 가득 채우면서 정작 자신의 인생은 돌보지 않는 걸까’ 라며 시건방지게 짠한 마음까지 품어왔었는데, 한 순간의 방심으로 꼭 내가 그 짝이 될 수도 있는 상황인 것이다. 열 달간의 임신과 육아로 심신이 지쳐있는 이 때, 또 다시 임신을 하게 된다면… 그야말로 청천벽력이다. 넷째까지 낳고도 건재한 여자 개그맨이 많은 사람들의 귀감이 되고 있긴 하지만 그건 그 사람얘기이고, 나는 인생의 모든 항로를 수정해야 하는 아이 낳기를 더 이상 하고 싶지 않다.
임신에 대한 공포는 어제, 극에 달했다. 요즘 그렇지 않아도 잠이 몰려들고 입맛도 없어 이상하다 싶었는데, 생전 연락이 없던 사촌동생이 태몽 비스무리한 꿈을 꾸었다며 친히 전화까지 주시니… 공포와 긴장감에 쓰러질 지경이었다. 바로 약국으로 달려가 임신진단시약을 사고 소변을 받아 키트를 담갔다.
결과는….음성.
뛸 듯이 날아갈 듯한 기분에 걱정하고 있을 남편에게 바로 문자를 날리니, 금방 회신이 온다. “나는 순간 셋째 이름을 생각하고 있었지 뭐야. 암튼 다행이다.”